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겨 한다는 기록이 많다. 한 해의 농사를 마치고 신에게 감사하며 모두 모여 춤추고 놀기를 즐겨한다는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같은 추수감사의 제천행사가 그러하고 중국 진나라 때 역사책인 '진서'마한전에 나오는 "5월에 시뿌리기가 끝나면 무리지어 춤추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는 기록에 따를는 백제의 봄 행사가 그러하다.

  춤추는 모습은 고구려의 무용총 같은 고분 벽화로 남은 것이 더러 있는데 노래란 것은 소리로나 남아아 하니, 볼 수 있기로는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동용봉봉래산 햐ㅇ로의 악기 타는 사람이 고작이다.

  바깥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질 만큼 풍류가 성했던 것치고는 것이 많지 않아 아쉬움을 더하는데, '고려사' 악지에는 백제 노래 다섯 편의 이름이 전한다. 바로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정읍, 지리산이 그것이다. 이중에 "달하 노피곰도다샤"로 시작하는 정읍사는 가사가 그나마 남아있지만 다른 노래들은 대강만 전하지 가사마저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으나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서 생명을 잃지 않은 백제 노래가 하나 남아 있으니 '산유화가'가 그것이다.

  궁야평 너른 들에/논두 많구 밭두 많다/ 씨뿌리고 모 욍겨서/충실허니 가꾸어서/ 성실하게 맺어 보세//
산유화야 산유화야/오초 동남 가는 배는/순풍에 돛을 달고/ 북얼 둥둥 울리면서/ 어기여차 저어가지/ 원포귀범이 이 아니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이런 말이 웬말이냐/ 용머리를 생각허면/구룡포에 버렸으니/슬프구나 어와 벗님/구국충성 다 못했네//
산유화야 산유화야/입포에 남당산은/어이그리 유정턴고/매년 팔월 십륙일은/왼 아낙네 다 모인다/ 무슨 모의 있다던고//
산유화야 산유화야/ 사비강 맑은 물에 /고기 잡는 어옹덜아/온갖 고기 다 잡어두/ 경칠랑은 낚지 마소/ 강산 풍경 좋을시고//
에-헤-에헤야-헤헤/에-헤-에여루 사-사-뒤-요-

  이노랫말에는 패망한 백제유민의 슬픈 삶이 두장면 들어있다. 하나는 '오초 동남 가는배'인데, 이배는 백제가 망하던 해 8월에 백제의 왕족, 과관, 백성들 1만 2,000명이 부여에서 배에 실려 당나라로 잡혀가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날을 기려 옛날에는 해마다 8월 16일면 백리 안쪽에 사는 부녀자들이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유왕산에 다 모여 백제 유민의 한풀이를 하는 놀이를 했는데 이를 '유왕산놀이'라고 하며, 그 다음날에는 양화면 입포리의 남당산에서도 같은 놀이를 했다고 한다.

  또하나는 "용머리를 생각허면/구룡포에 버렸으니/슬스구나 어와 벗님/구국충성 다 못 했네"하는 부분이다. 이는 '조룡대 전설'과 관계가 있다. 고란사 밑의 유람선 선착장 족에서 백마강 상류 쪽을 보면 보이는 한 바위섬이 조룡대, 곧용을 낚은 바위라는 곳이다. 백제를 치러 온 당나라 군사들이 백마강을 건너려 하면 맑았다가도 갑자기 안개가 걷잡을 수 없이 자욱하게 끼어 도무지 건널수 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정방이 백제의 용한 도사를 잡아 목숨을 위협하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의자왕이 밤에는 용이 되어 백마강을 지키려고 안개를 피운다고 했다. 그말을 들은 소정방은 바로 그 바위에 앉아 백마의 머리를 머리를 미끼로 해서 낚시를 드리워 용을 낚아냈다. 그러자 운무는 말끔히 걷히고 당나라 군사가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마침내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또 한 이야기는 백제부흥운동과 관련지어 전한다. 소정방이 사비를 함락시켰으나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이 끊이질 않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무왕의 화신인 용이 백마강을 지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드리우니, 배가 고파 견디다 못한 용이 미끼를 먹으려고 달려들어 마침내 잡혔다. 그러자 백제부흥군도 힘을 잃어 패하고 말았으니 백제부흥의 꿈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는 애기다. 백마강의 용은 백제인들의 꿈과 한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후 그 한을 '산유화가'에 담아 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전설들이 '산유화가가 백제 가요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한다. 산유화가가 충청도 지역뿐 아니라 경상도나 황해도 일원에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은 다른 노래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것이다.

  '산유화가는 모를 심거나 김을 맬 때 부르게 되어 '모심는 소리라고도하고 한편 '매나리'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처럼 구슬프고 처량한 가락을 '메나리조'니 '메나리가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명하지는 않으나 '산유화를 풀어'뫼놀이'라고 한 것이 '메나리'가 되었다고도 하고, '미나리꽃도 한철이라'는 말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아마 '산유화가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모를 심으면서 일할 때에 장단을 맞춰 주는 '모심는 노래', 곧 일노래로서 사람들의 삶과 호흡하며 전승되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므로 '산유화가'는 백제 때의 가락이나 가사 그대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세월과 함께, 부르는 사람들의 필요와 함께 자기 모습을 다듬어 가면서 전승되어 온 노래로서, 역사적인 연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에도 역사를 실어 담고 있는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