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의 부소산 서북편에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의 이름이 곧 낙화암이다. 암벽의 사이사이에 노송이 붙어 자라며 철따라 진달래 철쭉꽃이 붉게 피어나 일편단심으로 목숨을 던진 그 옛날 백제 여인의 고귀한 충절심을 되새기는 듯하며 절벽의 정상에는 육각정자 백화정이 날아갈 듯이 서 있다.
이 곳 백화정에 앉아서 바라다보이는 주위의 경관은 과연 절정으로 길손의 발길은 돌아 설줄 모른다. 천정대, 범바위를 스쳐 조룡대를 감출 듯 넘실거리며 흐르는 강줄기는 낙화암 밑에서 쪽빛으로 물든 채 부산(浮山)의 대재각 을 지나 규암의 수북정 옆으로 사라진다.
건너편 넓은 백사장은 강변의 버드나무 숲에 이어지고 마을에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저녁 연기는 강바람에 퍼져 나른다. 이렇듯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백제의 정신이 깊숙이 아로새겨진 낙화암이 청강을 딛고 유구히 서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낙화암의 백화정은 옛부터 시인 묵객의 발걸음이 끊일 사이 없었으며 현존한 백화정 건물은 1929년에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인묵객의 친목 단체에서 건립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남자가 없이 이룰 수도 없으며 여자가 없이 이룰 수도 없기에 남녀는 평등하며 부모 자녀가 모두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소임과 소행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많은 전쟁사가 기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쟁의 주역이 남자였다면 전쟁의 제물이 여자가 된 사례를 무수히 볼 수 있다. 우리 한반도에 삼국이 정립한 시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래로 우리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일컬어 오게 된 연유는 충효정신에 있었으며, 더욱이 한국의 여성은 정절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고 한걸은 나아가서 효행과 충절에 자신을 희생한 예를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를 한갓 진귀한 물건처럼 취급하여 타국에 선물로 보냈던 슬프고 치욕스런 일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중국 대륙에 일어났던 여러 나라와 우리 한반도에 건국됐던 여러 나라 사이에 진귀한 선물이 빈번하게 오고 갔던 것을 읽을 수 있다.
선물을 주고 받는 쌍방이 서로 대등한 조건에서 부담이 없는 것이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인 친선의 교류가 되며 물물교환 형식이 무역으로 발전해 나가지만, 주로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조공 형식을 상납하는 배후에는 청탁이 따르게 마련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579-632) 때의 일이다. 진평왕은 재위 53년 7월에 사신을 당으로 파견하며 아름다운 여자 두 사람을 보내어 당 태종(唐 太宗)에게 바쳤다. 태종은 멀리 신라에서 보낸 사신을 맞으며 진귀한 물건과 미녀 두 사람까지 받게 되어 대단히 흐뭇하였다.
이 때 태종의 신하 중에 위징(魏徵)이라는 자가 있어 왕에게 말하기를 두 여인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하자, 태종은 신하의 말을 기쁘게 받아 들여 말하기를 [남쪽 임읍(林邑)에서 바쳐 온 앵무새도 춥고 외로워 항상 부르짖으며 제가 살던 고향을 그리며 슬퍼했거늘 이 두 여인이 가족과 고국을 떠나 수만리 이국땅으로 떠나 와 있으니 그 심정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하며 사신들과 함께 신라로 돌려보냈다.
이 때가 백제는 무왕(武王) 32년으로 국력이 강성하여 신라의 변경에서 자주 전쟁을 일으켜 많은 땅을 취했으며, 고구려도 신라와 국경에서 전쟁이 계속되던 때라서 진평왕은 신라의 보전을 위하여 제3의 힘이 절실히 요망되던 때이므로 당나라에 지나친 사대주의적인 외교와 조공으로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라는 진평왕으로부터 선덕, 진덕, 무열, 문무왕까지 5대에 이르는 일백여년간의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통일 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국력을 모두 당 나라의 도움으로 지탱하다보니 굴욕적인 숭당(崇唐) 외교를 불사했으며, 한편으로 장기간의 세월을 두고 간청해 온 신라의 청원으로 삼국 통일의 주역을 맡게 된 당 나라는 나름대로 한반도를 모조리 당의 통일천하에 예속시키려는 음모를 깊이 간직한 채로 신라와 연합 세력을 구축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 하였으니 신라와 당 나라는 동상이몽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복잡하고 미묘한 승전의 후유증이 꼭 따라 붙었던 것이다.
결국 신라의 삼국 통일은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광활한 만주 벌판을 영원히 우리 한민족의 수중에서 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위의 얘기는 뒤로 미루고 신라 성덕왕 때의 여자와 관계되는 또 하나의 기록을 보면 성덕왕은 재위 22년(723) 3월에 당으로 사신을 파견하며 두 명의 미녀를 바쳤는데 이름은 포정(抱貞)과 정울(貞蔚)이며 벼슬아치들의 딸이었다.
왕은 포정과 정울을 보낼 때 많은 의복과 기구와 노비와 차마까지 갖추어 보냈다. 당의 현종은 이미녀 두 사람을 맞아 말하기를 [이 여자들은 모두 신라 왕가의 출신으로 고국을 떠나 멀리 왔으니 그 심중이 어떠하랴, 나는 차마 머물러 두지 못하고 돌려 보내겠노라]하며 후하게 대접하여 선물을 주어 귀국시켰다.
국가간에 정복자는 피정복 지역의 남녀를 인질이나 노예로 끌어가는 가례가 동서고금에 빈번하였지만, 크고 작은 국가 사이에 미녀를 뽑아 헌납하는 예는 희귀하며 아무리 국운이 좌우되는 청탁이라도 여자를 물건처럼 이용함은 인류의 역사에 되풀이 될 수 없는 사건인 것이다.
불생 중 다행으로 백제의 기록에는 인접국이나 중국과의 외교에서 여자를 주고 받은 사실을 찾아 낼 수 없다. 도미(都彌)라는 평민의 부인이 일부종사하는 정절의 미담이 전해 올 뿐이다.
서기 660년 백제가 신라와 당 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망하게 될 때 백제인의 훌륭한 정신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삼충신의 충성심이며, 낙화암의 전설이요, 3년간 계속되는 치열한 광복 운동이라 하겠다.
백제의 26대 성왕이 재위 16 년에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며 나라 이름까지 남부여라 바꾸며 이루어 보려던 꿈은 삼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려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성왕도 불행히 신라의 병사들에게 잡혀죽었다. 백제의 국력은 마지막 법왕과 무왕, 의자왕대에 최강을 자랑하게 되었다. 의자왕의 치적은 더욱 혁혁하여 신라나 고구려는 견뎌내기 어렵게 했고 신라로서는 김유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화랑도 출신의 수많은 병사를 양성하였지만 단독으로 백제와 대결하기에는 무력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당 나라와 연합군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며 백제는 국운이 다했던지 의자왕도 재위 16년부터는 튼튼한 국력을 밎고 정사를 소홀히 다루며 조정의 신하들을 채용함에 있어 현명한 판단을 잃어가고 당 나라에서 보내오는 조서의 내용을 모두 무시해 버렸다.
당 나라의 입장에서도 한반도에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는 백제국을 앉아서 바라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년)7월 사비도성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함락되어 왕은 공주로 피신하게 되었고, 성내에 살던 왕족을 중심으로 한 고위층의 남자들은 모두 전몰하거나 포로가 되자, 비빈과 궁녀 등 도성내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침략군이 산성내에까지 몰려들자 이들 백제의 여인들은 적군에 잡혀가서 치욕스런 삶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의 태종 춘추공조에도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는 바 [백제 고기에 이르기를 부여성(사비성~부소산성)의 북각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에 임하였다........... 차라리 자결할 지언정 적의 손에서 죽지 않겠다 하고 이곳에 달려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러한 연유로 타사암(墮死岩~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전해 온다.
위에 적은 바와 같이 백제의 여인들이 몸을 던져 죽어간 절벽은 타사암이라고 부르던 것을 후세에 여인을 꽃(花) 으로 비유하여 아름답게 불러 꽃이 진 바위 즉 낙화암(落花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부 속된 전설에 의하여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궁녀의 수가 삼천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는 해괴한 이야기이며, 곧 많은 궁녀와 여인들이 이곳 낙화암에서 우국충절을 지켜 죽어간 것을 뜻하는 것이다.
궁성 내에 의자왕이 거느린 궁녀가 모두 삼천 명이라는 이야기는 백제의 만년에 음주와 가무 등 유흥을 즐긴 사실을 대변하는 가상적인 숫자로 보아야 되며, 낙화암을 의자왕이 데리고 놀던 많은 궁녀들이 떨어져 죽은 곳이라고 간단히 보아 넘겨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백제는 건국 설화에서부터 사대를 배격하고 자주 자립하는 주체성을 고수하는데 역점을 두었으며, 일찌기 해양기술을 발전시켜 국제적인 다변 외교를 통한 문물의 교역 및 해외 활동이 왕성하였고, 멸망의 고정에서도 백제의 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초토작전에 의하여 불타면서 백제의 정신, 백제의 혼을 남긴 것이다.
낙화암! 우리 나라의 모든 여성이 정조를 생명보다 더욱 소중하게 지키며 국난의 시점에 서면 가장 용맹스런 병사보다도 더욱 용감하고 지혜롭고 끈기있게 항거해 나온 역사적인 전통을 심어놓은 낙화암은 하나의 전설이 어린 바위가 아니라 백제의 정신과 우리 한민족의 혼이 담긴 암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