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땅에서 가장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은 능산리 고분군이다. 부여 근방에는 백제 고분 수백 기가 수십 군데에 흩어져 있다. 그러나 대개 세월에 씻겨 형체가 제대로 남은 것은 드물고 또 일찍부터 도굴되어 온전한 것도 많지 않다. 능산리 고분군은 그 많은 고분들 가운데 부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봉분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규모 면에서도 큰 축에 드는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사적 제14호로 해발 121m의 나지막한 능산리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고분군 입구에서 고분으로 가기 전에 왼쪽으로 안쪽에 한창 발굴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일전에 발굴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금동용봉봉래산 향로가 나온 곳이다.입구에서 안쪽으로 5분쯤 걸어 들어가면 왼쪽 언덕빼기에 곤분 7기가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남향하여 얌전히 엎드려 있다. 예전부터 왕릉으로 알려졌던 곳이거니와 사비 시대 왕이 여섯 분이었으니 역대 왕들은 대개 여기에 묻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부분 일찌감치 도굴되었기도 하고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지표가 전혀 없어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전북 익산에는 무왕과 왕비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쌍릉이 있으니 무왕은 여기에 묻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흔히 신라 왕릉들이 그 규모의 거대함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반면에 백제의 왕릉들은 옹기종기 모여 납작하게 수그린 품이 매우 아늑한 느낌을 주어 죽음조차도 한가롭고 평온하게 느껴질 정도다.

  외형은 봉토분으로 밑 지름이 20~30m쯤 된다. 아래쪽에 호석(護石)을 두른 것도 있다.내부 구조는 돌방을 쌓고 옆문으로 문을 낸 굴식 돌방무덤으로, 다른 백제 무덤들이 다 그렇듯 일찍이 도굴되어 버려서 실제로 발굴했을 때에는 부장품들이 파편으로나 남았을 따름이었다. 5호 분에는 관대 위에서 두개골 조각과 칠한 나무관 조각, 뚫린 모양 금동 금구, 꽃무늬 금동 금구가 있었고 2호분에도 칠기 조각과 금동 둥근머리 못이 있었다.이 능산리 고분들은 이미 1915년 무렵부터 일본인들이 발굴했는데 그중 '동총'이라고도 하는 1호분에는 사신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분 안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사람들의 문화로서, 특히 내세의 수호신으로서 사신도를 중심으로 그리는 것은 7세기 무렵의 일이다. 그러므로 백제 고분에서 사신도 벽화가 나왔다는 것은 이 무렵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으며 백제에서도 도교가 어느 정도 수용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굴식 돌방무덤인 이 1호분은 현실과 연도를 갖추고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완전히 지하에 자리잡았다. 현실의 벽면과 천장은 각각 1매짜리 거대한 판석을 세우고 덮어 이루었다. 돌의 표면을 물갈이하고 그 위에 주, 황, 청, 흑색의 안료를 써서 동쪽 벽에는 청룡, 서쪽 벽에는 백호, 북쪽 벽에는 현무, 그리고 남쪽 벽에는 주작의 사신도를 그렸다. 또 천장에는 연꽃과 구름이 그려져 있는데 이 모두가 오랜 세월 습기가 차고 바래서 빗물에 얼룩이 진 듯하여 선명하지는 않다. 이 고분의 지형지세도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가 되는 능선이 감싸고 있고 앞으로는 동서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멀리 남쪽으로는 주작이 되는 안산이 자리하고 있어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도 사신에 싸여 있는 자리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구려의 사신이 매우 강건하고 그 분위기는 절로 신기가 느껴지는 데에 견주어 백제 고분의 백호나 청룡은 너무 유려하고 부드러워 귀기는커녕 온화하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문화를 수용하되 얼마나 잘 소화해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