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면의 뒷산이라 할 성흥산에 쌓은 이 산성에 관해서 "삼국사기"에는 '백제본기'의 제24대 동성왕 23년(501) 조에 "8월에 가림성(임천의 옛 이름)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이 산성은 백제 시대에 쌓은 성곽 중에서 쌓은 연대와 당시 지명을 알려 주는 하나뿐인 예로 귀중한 유적이다.

  동성왕은 웅진 시대에 백제의 부흥 기틀을 다진 왕으로 동성왕 대(479~501)에는 수도 웅진에 궁실을 중수하고 임류각이라는 정자를 짓는가 하면, 이 가림성과 함께 우두성, 사현, 이산 등의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나 고구려와의 관계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시절임을 알 수 있다.
  성흥산은 268m로 높지는 않으나 백마강이 휘돌아가며 강경 쪽으로 빠져나가며 만든 평야 지대에 솟아 있기에 산 위에 오르면 가까운 부여, 강경, 논산을 넘어 익산의 미륵산, 멀리는 장항제련소까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지형지세 덕으로, 특히 신라에 대한 방어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성왕은 이 가림성 축성 때문에 시해되고 마니 그에게는 불운을 가져다 준 성이라고 하겠다. 당시 위사좌평은 높은 관직이었으니 동성왕은 성의 중요성을 고려한 것이겠으나 이 산성을 지키도록 명을 받은 위사좌평 백가는 그 일이 못마땅해서 병이라고 칭하고 사직하였음에도 왕이 허락하지 않자 원망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냥을 좋아하던 동성왕이 그해 11월(음력)에 사비서원(부여)에서 사냥을 하다가 큰눈이 내려 길이 막히는 바람에 마포촌이라는 곳에서 머물게 되자 백가는 이때를 틈타 자객을 보내 왕을 시해한 것이다. 백가의 반란은 25대 무령왕이 즉위하자마자 진압됐고 백가는 참형되어 백마강에 버려졌다.

  성흥산성은 뒤에 백제부흥운동 때에도 중요한 근거지였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성흥산성을 공격하면서 성이 험하고 견고해서 공격하기가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높이가 3~4m 되는 성벽이 600m에 걸쳐 세워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산등성이에 성벽을 쌓은 테뫼형 산성으로 서쪽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다. 성안에는 남ㆍ서ㆍ북문 터와 군창터, 우물터 세 군데가 남아 있으며 사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